매거진

예술로 놀고 먹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나는 아마추어입니다
작성일: 2019-12-30
작성자 : 아트위드 기간 : ijy828@naver.com

나는 언제나 초보다. 얼뜨기 아마추어다. 예술 운운하며 글을 쓰지만 실은 잘 모른다. 모르니까 용감하다. 그저 보이는대로, 느껴지는대로 직관적인 감흥에 충실하다. 오래도록 그림을 보아 온 사람은 맞지만 알아 온 사람은 아니므로, 그리고 앞으로도 그림 지식에 충실할 생각은 없으므로, 나의 예술 감흥이란 다분히 감각의 제국같은 것이었다. 선험적 직감이라거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나는 되도록 진지 빼고 심각 버리고 가볍고 경쾌하게 예술에 접근했다. 더없이 편했다. 모른다는 건 권력이었다. 잘 모르니까 내맘대로 봐도 되고 영 모르니까 내멋대로 느끼면 되는 거였다. 예술의 개념이라던가 무슨 사조라던가 이론적인 것은 너무 아득했다.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는 예술들도 너무 멀었다. 나는 멀리 있는 미학보다 가까이 있는 미생들이 좋았다. 주변의 사소한 예술을 발견하고 향유하는 재미에 살았다.

게다가 좋은 전시들이 흔해졌다. 국립 중앙 박물관의 전시들이 틀을 깨고 발상을 전환하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국립 현대 미술관의 전시들도 인식을 재편하고 역사를 재조명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술,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시대적 요구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다. 과감한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다해도, 예술에 괴리감을 떨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술은 너무 멀기만 하고 진입 장벽은 높기만 하다. 전시회의 광활하고 드넓은 공간에 압도되고 과한 의미 부여에 자꾸 숨이 막힌다. 예술 앞에 쫄보가 된다. 도슨트의 열렬한 해설을 들어보아도 그 때 뿐이다. 줄서서 우르르 몰려다니다 보면 어느새 미술관 밖으로 밀려나와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본거지. 그럴 땐 그냥 한 자리에 멈춰서는 것이 좋다. 천천히 눈 앞의 그림 하나에만 집중해 보는 것이 좋다. 풍경이면 그 속에 잠시 머물러 보고, 추상이면 가만히 마음 결을 들여다 본다. 그늘 울울한 풍경 안에서 잠시 앉아 쉬고, 백번의 붓질 속에 들어간 백개의 마음 결을 짐작해 본다. 봄을 넘어 느낌으로 다가가 보면, 가만한 가운데서 초록 숨 하나가 톡 틔여질 터였다.

예술은 미친 짓이다. 원래 미쳐야 삶이 재밌는 법이다. 나도 향유에 미쳐 틈만 나면 온갖 전시들을 보러다녔다. 자주 멈춰섰고 골똘했다. 심장을 말랑하게 해놓으니 행복을 느끼기 쉬운 체질이 됐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쉽게 감탄했고 깊게 감동했고 유난 떨며 글로 남겼다. 참 쉬운 여자랄까. (웃음) 며칠전에도 예술의 전당에 들러 호들갑 떨며 전시를 보고, 예당 근처를 터벅터벅 지나가고 있었다. 주유소 한 켠 분홍 벽, 핑크 갤러리. 이름은 이토록 예쁜데 생뚱맞게 주유소 2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1층 별관에서 운명처럼 그녀를 만났다.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첫 전시. 생애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박해리 작가. 작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작품에도 말간 수줍음이 가득했다. 작가라는 명명에도 어색해했다. 순한 미간으로 연신 웃는데 콧등에 땀방울이 소록소록 맺혔다. 전시 제목도 숨결 빛. 이제 막 예술을, 그 숨결을 시작하는 순전한 결기가 느껴졌다. 사랑스러웠다. 한껏 응원하는 마음.

눈이 부신 전시들을 쫓아다니느라 잠시 잊었다. 초보 작가의 설렘, 설렘이 주는 감흥, 생의 놀라운 자극을. 하늘색을 주로 쓴 작품들은 시원하고 순박했다. 밝고 순한 빛을 내는 모든 것들을 담아내려 애썼다. 바다와 진주, 하늘과 꽃, 신부와 부케 등 마음의 순도와 맑음을 전하려 애쓴 흔적들. 작품들에 고스란한 그 애씀이 좋았다. 초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애티튜드다. 그러다가 전시 한 켠, 희부윰한 하늘의 한줄기 빛아래 아득한 지평선 위를 달려가고 있는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사막같은 세상을 열심히 달려나간다. 수많은 좌절, 쓰러짐을 겪어왔어도 그녀는 이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다시 일어나 달릴 것이다. 절대 무릎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림의 결연에 나도 따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그림 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녀, 작가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언제고 생의 아마추어로 끝없이 달리고 있는 나 자신과도 조우했다.

초보가 좋고 아마추어가 좋다. 누구나 처음 겪는 자기 앞의 생이므로,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생의 초보들인 셈. 그런데도 다 안다는 듯 인생을 논하고 더 어려운 말로 예술을 말한다. 나는 예술은 진주 목걸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비싸고 멀리 있다는 편견이 존재하는. 하지만 진주 목걸이는 플리마켓 좌판에서 단돈 얼마에도 구입할 수 있는 물건일 뿐이다. 이처럼 예술도 좀 더 편하게 소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 가까이 맘껏 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이 멀리 있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재하며 손에 잡히는 가치이기를 바란다. 예술계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우리들이 뛰노는 광장이기를 원한다. 쥐뿔도 모르면서 늘 이렇게 용감하다. 아마추어가 좋은 건 마구 도전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지금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다. 지금껏 해온 일과 맥락은 같지만 전혀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다. 세상 모든 초보와 아마추어들을 위한 예술 플랫폼 Art With. 예술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다함께 예술 하자는 마음으로 스타트업. 가까운 예술, 우리곁의 예술가를 꿈꾼다. 그 예술의 선한 영향력을 선순환하자는 이야기다.

그림 속 그녀처럼 한참 더 뛰어야 한다. 쭉 달려나가야 한다. 그런데 천성이 게을러서 옆도 뒤도 안보고 달릴 자신은 없다. 그저 지금껏 그래왔듯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것이다. 달리다가 숨차면 나무 아래 쉬어갈테고 당신에게 같이 가자고 손내밀 것이다. 빨리 가는 것엔 관심 없다. 생을 속속들이 누리면서 가고 싶다. 함께 놀면서 가고 싶다. 내 인생의 두가지 열정. 죽을 때까지 배우고 힘닿는대로 놀자!를 사부작 사부작 실천해 가면서. 


[임지영 나라갤러리/아트위드 대표/ <봄말고 그림>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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